주사를 맞기 전에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는 이유.


손으로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는 이유는 미리 고통을 주어 고통에 대한 역치값을 올려서 주사바늘이 엉덩이에 들어갈 때 고통을 상대적으로 적게 느끼기 위해서이다. 
가끔은 이게 손으로 두드리는 것인지 주사인지를 구분하지 못해서 어느샌가 끝난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삶에서도 엉덩이를 톡톡 두리는 것처럼 미리 작은 고통들을 주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대화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를 한다면 아무리 민감하고 생각이 다른 주제더라도 좋은 대화를 할 수 있고 서로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렇게 대화를 하고나면 실제 대화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별 일 아닌 것처럼 지나갈 수 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된 이유는 사람간의 관계나 대화 등이 아니더라도 나의 불안한 미래와 같은 일어나지 않을 일들에 대해 미리 염려해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것들에 대한 생각과 대비를 엄청했는데 정작 그 일을 겪으니까 사실 별 게 없었다. 

물론, 진짜 그게 알고보면 쉬운 일인데 내가 미리 여러가지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기에 쉽게 느낀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예전보다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그런 여유도 생긴 것 같다. 

개인적인 일이든, 사람들과의 관계이든 이 방법은 중요한 것 같다. 

특히, 연인이나 부부사이에서이다. 

나는 엄마와 누나가 대화하는 걸 많이 들어봤다. 또 엄마나 누나와 많이 대화를 해서 그런지 남자들이 여자들 마음이나 심정을 참 모른다 걸 많이 느꼈다. 

그래서일까. 나는 나중에 여자친구와 또, 결혼해서 아내와 많은 대화를 할 것이다. 
이는 둘만의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 뿐만 아니라 실제 그 상황이 일어났을 때 잘 대처할 수 있을거라 믿기 때문이다. 
정말 별거 아닌 일처럼. 

아내에게는 특히 ‘아내에게 교육을 받는다’라는 생각으로 여러가지 주제에 대해서 대화를 하고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이런 게 사랑받는 방법인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에게 어떻게 해야 잘 사랑을 주는 방법을 알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픔과 고통에 대한 한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아래에 남긴다. 

••• 선택으로서의 고통 •••


  어느날 파리의 한 호텔방에 드러누워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를 읽다 보니, 마침 마라톤 러너에 관한 특집 기사가 눈에 띄었다. 여러 유명한 마라토너들을 인터뷰해서, 레이스 도중에 자신을 질타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어떤 만트라(mantra, 원뜻은 불교 힌두교의 진언眞言 신들에 대하여 부르는 신성하고 마력적인 어구)를 머리속으로 되풀이해서 외우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그들의 대답이었다. 꽤 흥미로운 기획이었다. 그 기사를 읽고 있자니까, 모두 정말 다양한 생각을 하면서 42.195킬로미터를 달리고 있구나, 하는 감탐이 절로 나왔다. 그만큼 풀 마라톤이라는 것은 가혹한 경기인 것이다. 만트라라도 부르짖지 않으면 하지 못할 힘든 일이다.
  그 중에 한 사람은 형(그 사람도 마라토너)으로부터 배운 문구를, 마라톤을 시작하면서 줄곧 머릿속에서 되뇐다고 했다.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이라는 게 그의 만트라였다. 정확한 뉘앙스는 번역하기 어렵지만, 극히 간단하게 번역하면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라는 의미가 된다. 가령 달리면서 ‘아아, 힘들다! 이젠 안되겠다’라고 생각했다고 치면, ‘힘들다’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젠 안되겠다’인지 어떤지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이 말은 마라톤이라는 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결하게 요약한 것으로 생각한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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