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존 내시의 ‘게임이론’을 좋아하는 이유
여러 분야에 이 이론이 굉장히 유의미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설득적으로 잘 적용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다.
사람을 굉장히 의심하고 불신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사람을 바라볼 때 선한 존재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친절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말을 먼저 건네도 그것을 부담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미국에는 같은 주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더라도 동네마다 버스를 타면, 모르는 사람들끼리 말을 거는 게 자연스러운 동네가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는 동네가 있다고 한다. 참으로 웃긴 게 말을 거는 게 당연한 동네에서는 무심하게 혼자서 가만히 사람을 이상하게 보고 처음보는 사람에게 말을 안거는 동네에서는 말을 거는 사람을 이상하게 본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단번에 설명해줄 수 있는 게 게임이론이다.
일반적으로 게임이론의 보상체계는 다음과 같이 가정한다.
1. 함께 협력을 하면, 둘 다 +2점을 보상받게 된다.
2. 한명이 협력하고 한명이 배신하면 협력을 택한 사람은 -1점, 배신을 택한 사람을 +3점을 받게 된다.
3. 둘다 배신할 하면, 둘 다 0점을 받게 된다.
위의 게임을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이렇다.
각 구성원이 가진 전략과 그 구성원들의 수, 라운드의 갯수 그리고 의사소통의 혼선에 따라 그 그룹에서 살아남는 전략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지역에서는 사람을 불신하는 게 생존하는 데 유리하다. 반면, 사회가 안정적이고 질서적이며 사회적 관계가 중요한 사회에서는 믿음이라는 가치가 중요해진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여러 관습이나 문화 등이 급변한 것처럼 전쟁과 같은 혼돈과 급작스러운 변화는 굉장히 많은 것들에 영향을 준다.
이걸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다. 대인관계에서 부정적인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면 사람을 기본적으로 믿지 않을 것이고, 긍정적인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면 친절과 배려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이는 개인을 둘러싼 환경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 것 같다. 부가 있거나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지위를 갖는 사람들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믿음과 배려를 기반해 행동할 것이고,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사람을 기본적으로 불신하고 의심하는 게 생존에 유리하다. 괜히 신뢰나 믿음을 주었다가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빠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안정성에 따라 사람들의 태도와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 같다.
갑자기 뜬금없지만, 임상심리학자인 조던 피터슨이 지은 <12가지 인생의 법칙 - 혼돈의 해독제>의 책을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법칙7.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있는 길을 선택하라. 283~284page)
1984년, 나는 데카르트와 같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같은 길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인류 역사에서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데카르트와 어찌 감히 동질감을 가질 수 있겠는가. 다만 온갖 의혹에 사로잡혀 혼란스러웠다는 점은 비슷했다. 진화론의 핵심을 이해하게 되면서 어린 시절에 배운 기독교 교리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그 후로 나는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교리와 소망적 사고를 구분할 수 없었다. 기독교 신앙의 대안으로 사회주의에 잠깐 관심을 두었지만, 사회주의도 실체가 없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위대한 작가 조지 오웰을 통해, 사회주의적 사고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진정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부유한 사람에 대한 증오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덕분이었다.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자보다 더욱 자본주의적이었다. 사회주의자도 자본주의 못지 않게 돈을 신봉했다. 사회주의자는 여러 사람이 돈을 나누어 가지면 인류를 괴롭히는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돈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도 많고, 돈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더 많다. 부자들이 이혼하고, 자녀들과 사이가 좋지 않으며, 존재론적 불안에 시달리고, 암과 치매에 걸린다. 게다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채 외롭게 죽기도 한다. 마약과 술에 중독되는 것도 돈의 저주 때문이다. 또한 권태는 의미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을 무섭게 짓누른다.
위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사회주의가 약자를 배려하고 그들을 위해서 나온 사상이 아니라 상대방을 증오하는 마음에서 출발했다는 조던 피터슨의 생각에 동의를 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대학교에서 사회주의 이론을 공부할 때에는 굉장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점차 이 이론과 적용 그리고 현실들을 볼 때마다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념을 억지로 현실에 적용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수 많은 변수나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고 이념과 책 속에서 나오는 변인들로만 이 세상이 구성되어있다고 가정을 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점점 보이기 시작해서 그런 것 같다.
게임이론을 조금만 더 확장해서 생각하면, 내가 의문을 품고 이상하게 느꼈던 부분을 정말 명쾌하게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마르크스의 이론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받은 이유는 분명하다. 새로운 차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바로 ‘정치’라는 차원이다. 정확히는 경제적 격차, 사회적 격차, 문화적 격차 등을 강력한 정치적 집단을 통해 축소하거나 없애버리는 것을 말한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은 그 동안 어느 누구도 말하지도 발견하지 못한 ‘정치적 차원’을 강조할 것이고, 이에 대해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정치’라는 말을 통해 내면에 감추어둔 증오와 복수를 감추고 약자에 배려에 대한 구호를 돋보이게 하면 다 해결될거라고 생각되냐고 반문할 것이다. 또한, 피지배계층이 지배계층을 정복하고 결국엔 그들이 지배계층이 되고난 뒤에 발생하는 새로운 증오와 복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왕좌와 갯수가 한정된 주요 핵심 권력은 누가 차지하는 게 타당하는 가?'와 같은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피지배계층이 지배계층이 되고 난 뒤의 모순이 사회주의의 가장 맹점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피지배계층이 지배계층이 되고 난 뒤의 모순이 사회주의의 가장 맹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링크에서는 게임이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바로 '나와 너가 환경 그 자체'라는 말은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사실인 것 같다.
그동안의 나는 환경이라는 것을 내가 극복해야할 대상이거나 받아드려야만하는 것만으로 생각했다.
그 동안 나의 신념과 생각은 틀렸던 것 같다.
영화 <기생충>을 보면서, 오만 생각이 드는 이유도 그렇다. 빈부나 사회적 계층 혹은 계급주의로만 이 영화로 보면 각 인물들이 하는 행동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사람이나 어떤 현상을 볼 때, 집단적으로만 보는 걸 정말 싫어한다. 특히, <기생충>이 흥행하면서 이 영화를 리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빈부격차나 사회적 지위 등을 통해서만 리뷰를 하는 영상들을 보면 나는 거부감이 들었다. 그 이유는 아마 게임이론에서 말하는 환경인 '바로 나 자신'이라는 가치체계가 내 신념과 의지와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반응했던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