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영웅이 난다.’가 아니라 ‘난세이기 때문에 영웅이 탄생한다.’


영화 <터미네이터 : 다크 페이트>를 보면 사라 코너와 존 코너는 심판의 날을 막았다. 그러나, 아무도 사람들은 그들이 인류를 구원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다. 미래에서 온 그레이스조차 사라 코너를 몰랐다. 
오히려, 사람들은 사라 코너를 구원자가 아닌 정신병자나 미국의 최고 현상범이라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이 영화를 통해 나는 ‘영웅’이나 ‘구원자’이라는 것은 평화나 질서 속에서 탄생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혼돈과 파멸 속에서 나오는 희망과 용기가 ‘영웅’이자 ‘구원자’라고 할 수 있다. 
평화와 질서의 세계에서는 영웅도 구원자도 단지, 평범한 사람일뿐이다. 다른사람들과 같은. 

영화 <다크나이트>에 나오는 인물들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질서의 세계에서 브루스 웨인은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최고 주주이자 돈 많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부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밤이 되고 혼돈이 가득한 세계에서의 브루스 웨인은 어둠의 무법자이며, 어둠의 기사가 된다. 또한 동시에 조커는 베트맨이 있기에 더욱 더 존재감과 희열을 느끼며 최악의 악행들을 저지르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주려고 한다. 

다시 영화 <터미네이터>로 되돌아오면,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다.
스카이넷과 리전은 필연적 존재이다. 그러니까 인류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것이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이 발견하지 않았어도, 다른 천재가 나타나 만유인력을 언젠가 발견했을 것처럼.
문명이 발생한 곳에서 공통적으로 불이나 도구, 언어 등이 보편적으로 사용하거나 발명 혹은 발견했던 것처럼. 

존 코너가 죽은 이유도 이런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존 코너는 스카이넷과 불가분의 관계으로 볼 수 있다. 존 코너와 사라 코너가 심판의 날을 막아서 스카이넷이 사라졌기 때문에 미래에서온 카일리스, 사라 코너와 카일리스의 아들인 존 코너가 존재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존 코너도 스카이넷이 사라진 것처럼 사라져야 했을 것이다.

대니가 영웅으로 추앙받고 인류의 구원자가 되기위해서는 반드시 '심판의 날'이 와야하며, 대니가 인류를 위해 희생해야 리전도 사라질 것이다.
영화 <메트릭스> 시리즈에서의 네오와 스미스 요원처럼, 혹은 <어벤져스: 엔드게임>까지의 인피니티 사가에서의 아이언맨과 타노스처럼 말이다. 


한편, 나는 괴델이 증명했다는 ‘신존재 증명’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타노스는 우주의 균형을 목표했다. 타노스에게 있어서는 균형은 긍정적인 성질이다. 
타노스가 아니더라도 보통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혹은 일반적으로도 균형이라고 하면, 긍정적인 성격을 띄는 단어이다. 
그러나, 타노스가 했던 행보를 보면 균형이라고 해서 반드시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타노스가 예상했던 것처럼 자연은 균형을 찾게 되어서 뉴욕에서 고래떼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생태계는 다시금 회복이 되었다. 

그러나, 자연은 다시 회복되었을지는 몰라도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사라졌다. 
그렇기 때문에 괴델이 가정했던 것처럼 이 세상은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성질이 띄는 것도 아니며 부정적인 성질이 띄는 것도 아니다. 

타노스가 했던 행보를 보지 않더라도 괴델이 했던 증명이 불완전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괴델은 수학의 불완전성에 대해서도 증명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괴델이 했던 ‘불완전성의 정리’ 따라서 그가 했던 ‘신존재 증명’은 불완전하다는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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